레이스 30분 전이다. 맥라렌 엔지니어들은 모니터를 보고 있다. 화면에는 숫자가 가득하다. 이 숫자들은 방금 끝난 3억 번의 시뮬레이션 결과다.
드라이버 오스카 피아스트리는 아직 헬멧도 안 썼다.
자동차 한 대가 쏟아내는 데이터
F1 자동차에는 300개 이상의 센서가 달려 있다. (AWS/F1 공식 자료) 이 센서들이 초당 110만 개의 데이터 포인트를 만들어낸다. 속도, 브레이크 압력, 타이어 온도, 연료 잔량, 서스펜션 움직임까지 포함된다. 한 경기의 레이스가 평균 1시간 30분이니, 경기 하나에서 나오는 데이터는 수십억 개에 달한다.
사람이 눈으로 다 읽을 수 없는 엄청난 숫자들이다.
예전에는 엔지니어들이 경험으로 판단했다. “이 타이어로 15랩은 더 버틸 것 같은데”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AI가 그 판단을 대신한다. 그것도 초당 3만 번씩 계산하면서 도와준다.
맥라렌은 레이스 전에 3억 번을 시뮬레이션한다
맥라렌은 레이스 주말이 오기 전에 약 3억 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Google Cloud Blog, McLaren Racing) 날씨, 트랙 온도, 경쟁 팀 전략, 세이프티카 등장 확률까지 전부 변수로 넣는다. 경우의 수를 줄이는 게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미리 가상으로 달려보는 것이다.
레이스 당일에도 초당 3만 번씩 시뮬레이션이 돌아간다. (Deloitte/McLaren Racing) 드라이버가 코너를 하나 돌 때마다, AI는 남은 레이스 시나리오를 수만 개씩 다시 계산한다. 맥라렌의 Chief AI Officer는 이 시스템의 정확도를 “섬뜩할 만큼 정확하다(Eerie level of accuracy)”고 표현하기도 했다. (HackerNoon)
맥라렌이 2024년과 2025년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2연패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레드불은 AI로 규정집을 읽는다
레드불과 오라클의 관계는 단순한 스폰서십이 아니다.
2025 시즌부터 레드불은 Oracle GenAI를 트랙사이드 컴퓨터와 본사 시스템에 탑재했다. (Computer Weekly) 거대언어모델(LLM)과 검색 증강 생성(RAG) 기술을 써서 아주 복잡한 FIA 규정 문서를 실시간으로 처리한다. 경쟁 팀이 특이한 파츠를 달고 나왔을 때, “이게 규정 위반인가?” 하는 판단을 AI가 즉시 도와준다. 레이스 전략 시뮬레이션에도 같은 시스템이 들어간다.
이제는 규정을 가장 빠르게 읽고 해석하는 팀이 유리해지는 세상이 됐다.
페라리는 경쟁 팀 영상을 AI로 분석한다
페라리는 AWS를 써서 CFD(전산유체역학:Computational Fluid Dynamics)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scuderiafans.com) AWS와 F1이 파트너십을 맺은 이후, CFD 시뮬레이션 처리량은 3배 늘었고 소요 시간은 절반으로 줄었다. (AWS/F1 공식 자료)
여기서 끝이 아니다. 페라리는 LLM과 컴퓨터 비전 기술을 결합해 경쟁 팀의 영상까지 분석한다. (scuderiafans.com) 중계 카메라에 잡힌 다른 팀 차량의 에어로다이나믹(공기역학) 파츠 모양을 AI가 빠르게 읽어내는 방식이다. 예전에는 엔지니어들이 눈으로 직접 보며 분석하던 일이다.
메르세데스는 AMD EPYC 프로세서가 탑재된 슈퍼컴퓨터로 초고해상도 CFD 분석을 돌린다. 실제 윈드 터널(풍동) 실험을 하기 전에, 가상 공간에서 먼저 공기 흐름을 수백 번 시험해 본다.
실제로 F1 팀 10곳 중 4곳은 Neural Concept의 머신러닝 기반 공기역학 최적화 도구를 쓰고 있다. (raceteq.com) AI가 날개 모양을 추천하면, 엔지니어가 이를 검토하는 형태로 일한다.
AI가 못 하는 것
헝가로링 14번 코너다. 타이어 수명이 끝나가고 있다.
엔지니어의 모니터 화면에는 "이 타이어로 3랩은 더 버틸 수 있음"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드라이버는 스티어링 휠로 전해지는 진동과 코너링 할때 타이어 접지 상태를 통해 앞으로 2랩이 한계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다.
AI는 센서 데이터를 처리하고, 드라이버는 차의 감각을 읽는다. 이 둘은 아직 같지 않다. 드라이버가 피트로 들어가겠다고 Box box를 외치는 타이밍이나 코너에서 0.1초를 더 버텨내는 판단은 여전히 드라이버의 직관에 달려 있다.
2021년 아부다비 그랑프리 마지막 3랩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이프티카가 들어가고, FIA 레이스 디렉터 마이클 마시는 백마커(1랩 이상 뒤처진 차량) 일부만 선택적으로 추월시켰다. 그 덕분에 새 소프트 타이어를 장착한 막스 베르스타펜이 루이스 해밀턴 바로 뒤에 설 수 있었다.
마지막 1랩에서 베르스타펜은 해밀턴을 추월하고 월드 챔피언이 됐다. 그 어떤 시뮬레이션도 레이스 디렉터의 이런 즉흥적인 결정을 변수로 넣지 못했다. AI는 트랙 위의 데이터를 처리할 뿐, 트랙 밖의 인간을 예측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보러 서킷에 가는 걸까
레이스 전략의 많은 부분을 이미 AI가 짠다. 윈드 터널 실험을 하기 전에 AI가 날개 모양을 고르고, 피트스탑 타이밍은 초당 3만 번 시뮬레이션이 제안한다.
그렇다면 F1은 이제 AI 팀들의 알고리즘 대결일까? 드라이버는 그저 알고리즘을 실행하는 하드웨어에 불과한 걸까?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그 경계는 빠르게 흐릿해지고 있다.
다음 레이스를 보실 때 피트스탑 타이밍이 나오는 것을 본다면, 한 번쯤 생각해보셔도 좋다.
저 결정, 과연 누가 내린 것일까?
FAQ
2024-2025 컨스트럭터 챔피언십 2연패를 달성한 맥라렌은 AI 도입에 가장 적극적인 팀 중 하나다. 레이스 전 3억 번, 레이스 중 초당 3만 번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시스템은 Google Cloud, Deloitte와의 파트너십으로 구축되었다. 다만 레드불, 페라리, 메르세데스도 각자의 방식으로 AI를 깊이 활용하고 있다.
그렇다. F1 팀들이 AWS, Oracle, Google Cloud 같은 빅테크 플랫폼과 협력하는 것은 기술 개발을 공동으로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F1에서 검증된 실시간 데이터 처리, 대규모 시뮬레이션, CFD 최적화 기술은 향후 항공, 일반 자동차, 제조업 분야에도 그대로 이전되어 활용된다.
Computational Fluid Dynamics의 약자로, 우리말로는 ‘전산유체역학’이라고 한다. 컴퓨터 안에서 공기의 흐름을 계산해 차량의 공기역학 성능을 시험하는 기술이다. 실제 윈드 터널 실험을 하기 전에 가상으로 수백 번 테스트할 수 있어서 비용과 시간을 크게 줄여준다. F1 팀들은 FIA의 규제 때문에 윈드 터널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 CFD 활용도가 더욱 높다.
전략의 상당 부분을 AI가 보조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사고,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 드라이버의 돌발적인 직관 같은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은 여전히 알고리즘 밖에 있다. 또한 어떤 AI 기술을 선택하고 활용하느냐 자체도 팀의 새로운 경쟁력이 되었다. F1은 본질적으로 기술 경쟁이며, AI는 그 경쟁의 새로운 전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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