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노트북 앞에 앉아서 AI에게 무언가를 물었습니다. 기존 텀블러 홍보 문구였던 ‘가방에 쏙’과 운율이 맞는 단어가 뭐가 있을까. 정확한 프롬프트는 본인만 압니다. 8일 뒤, 신세계그룹 정용진 회장이 서울 강남 조선팰리스호텔에서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 사이 8일에는, 누구도 끝까지 들여다보지 않은 한 줄의 카피가 있었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 아침, 스타벅스코리아 앱과 온라인스토어에는 ‘탱크데이’라는 단어가 떴습니다. 옆에는 ‘책상에 탁!’이라는 문구도 함께 배치됐고요. 계엄군 탱크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떠올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AI가 한 작업의 책임은 누가 지는가.
이 질문은 스타벅스만의 질문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의 거의 모든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카피를 쓰고, 메일을 쓰고, 보고서를 쓸 때 AI를 곁에 두고 있습니다. 그 결과물이 어디선가 문제를 일으켰을 때, 책임은 어디에 가서 멈추는가.
우리 사회가 아직 한 번도 진지하게 답해본 적 없는 질문이라는 점에서, 이번 사태는 좋은 출발점입니다.
‘가방에 쏙’에서 ‘탱크데이’까지, 어긋난 문장들
2026년 5월 18일, 스타벅스코리아가 ‘버디 위크’ 이벤트로 텀블러 시리즈를 홍보하며 ‘5월 18일’ 아이콘과 ‘탱크데이’ 문구를 함께 노출했습니다. 즉시 비판이 폭주했고, 다음날 손정현 당시 대표와 담당 임원이 해임됐습니다. 일주일 동안 신세계그룹 자체 진상조사가 이어졌고, 5월 26일 정용진 회장이 직접 대국민 사과에 나섰습니다.
이날 조사 결과를 발표한 전상진 신세계그룹 경영총괄 부사장의 말에는, 한 줄의 진술이 끼어 있었습니다.
관련 직원들은 기존 텀블러 홍보 문구(‘가방에 쏙’)와 운율을 맞추는데 집중했고, 5·18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서울신문이 인용한 직원 본인의 진술은 더 직접적이었습니다. “기존의 텀블러를 홍보하는 문구였던 ‘가방에 쏙’과 운율을 맞춘 것으로 5·18은 생각하지 못했고 AI에 물어봤다.” JTBC가 인용한 회사 측 설명은 “생성형 AI 등을 참고했을 뿐, 5·18과의 연관성은 인지하지 못했다”였습니다.
카피의 짝은 ‘탱크’가 아니라 ‘가방에 쏙’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직원은 5·18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저 말맛을 맞췄을 뿐”이라고 진술합니다. 진술 자체는 사실일 수 있습니다.
다만 ‘가방에 쏙’에서 출발한 작업이 어떻게 ‘탱크데이’에 5·18 아이콘까지 결합된 카피로 세상에 나갔는가는, 한 사람의 글자 맞추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사람과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책임 소재를 사실관계 위에 다시 올려놓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실무자의 변명: AI는 단어를 뱉고, 인간은 맥락을 놓쳤다
가장 가까운 자리부터 짚어봅니다. 그 단어를 입력하고 결과물을 카피에 옮겨 결재 라인에 올린 실무자의 자리입니다.
기술적으로 보면 직원의 행위는 명확합니다. 본인이 AI에 질문을 던졌고, 답변 중 하나를 골라 디자인 시안에 반영했으며, 본인의 손을 거쳐 결재 라인에 올렸습니다. AI는 마우스를 클릭하지 않았습니다. 발주서를 쓰지 않았고, 이미지를 업로드하지도 않았습니다.
“5·18은 생각하지 못했고 AI에 물어봤다”는 진술이 흥미로운 지점이 여기 있습니다. 이 진술은 본인이 5·18을 의도하지 않았음을 피력하는 동시에, 판단의 일부를 AI에 위탁했음을 자백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5월 18일에 ‘탱크’라는 단어를 쓰는 일은, 판단을 위탁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운율을 맞추는 데 집중했다는 말은 진실일 수 있으나, 그 결과를 마케팅 카피로 채택하고 5월 18일 아이콘을 결합한 행위는 글자 맞추기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결과물이 사회에 던져질 때 어떤 맥락에 부딪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인간의 영역입니다. AI는 통계적으로 가능한 단어를 배열할 뿐, 그 단어가 광주에서, 박종철 유가족에게, 5·18 유공자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직원에게 사회적·역사적 검증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 실무자에게 그 책임을 다 떠넘기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7명의 합의자가 모두 첨부파일을 덮어둔 시스템
조사에서 드러난 결재 구조를 보면, 이 카피는 무려 4단계의 보고 절차를 거쳤습니다. 이커머스팀 제안, 팀장, 전략기획본부장, 대표이사로 이어지며 합의자만 7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그 7명 중 일부는 디자인 시안이 담긴 메일의 첨부파일조차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신세계그룹이 직접 확인한 내용입니다. 과거에 작동하던 법무팀 검토 절차도 이번에는 생략됐습니다. 4단계 결재 라인 누구도 ‘5·18 탱크데이’ 표현의 부적절성을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책임이 4중으로 걸려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책임이 단 한 번도 작동하지 않은 시스템입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책임의 분산(diffusion of responsibility)‘이라고 부릅니다. 단계가 많아질수록 각 결재권자는 앞 단계에서 충분히 검토했을 것이라 맹신하게 됩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사회적 리스크에 대한 판단은 아무도 내리지 않는 ‘공동의 부주의’ 상태로 빠집니다.
여기에 AI가 결합되면 분산의 속도는 훨씬 빨라집니다. 입력자도 ‘AI가 추천한 단어’라 생각하여 책임감이 옅어지고, 검토자도 ‘마케팅팀에서 확인했겠지’라며 첨부파일을 열지 않습니다. AI는 책임을 지지 않는 객체이므로, 결과물의 출처가 AI라는 사실은 인간의 검토 강도를 낮추는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정용진 회장이 사과문에서 “수많은 스타벅스 파트너들과 현장 직원들이 있습니다. 부디 이분들을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책임은 조직과 저를 포함한 경영진에게 있습니다”라고 밝힌 것은 이 책임의 분산을 다시 위로 끌어모으려는 시도였습니다. 마땅한 조치입니다. 다만 그 사과로 시스템의 빈자리가 저절로 메워지지는 않습니다.
조직에 무거운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책임의 위치를 최고경영자 한 사람으로 단일화하는 것 역시 다음 사고를 막아주지는 못합니다.
“챗봇은 대변인이 아니다” 캐나다 법원이 내린 단호한 정의
AI를 개발한 회사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법적으로 한층 까다로운 영역입니다.
캐나다에서는 2024년 2월에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에어캐나다(Air Canada)’의 챗봇이 한 고객에게 사별 운임 환불 정책을 잘못 안내한 사건입니다. 회사는 “챗봇이 한 말이라 회사 책임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으나, 법원의 판단은 단호했습니다. 챗봇은 별개의 법인격이 아니며 회사의 시스템일 뿐이므로, 정보의 출처와 관계없이 운영 주체가 모든 정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이 판결은 AI가 책임의 종착지가 될 수 없으며, AI를 가동한 주체에게 책임이 귀속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픈AI나 구글 같은 개발사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요. 2024년 8월 발효된 EU AI Act는 고위험 AI 시스템에 대해 환각과 편향을 막기 위한 ‘적절한 인간 감독(appropriate human oversight)’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위반 시 막대한 제재금이 부과됩니다.
주목할 점은 이 법안 역시 최종 책임을 사용 주체에게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AI 제공자는 시스템의 위험 평가와 투명성 의무를 지지만, 시스템을 실제로 배치하고 운영하는 주체가 인간 감독을 수행해야 합니다.
망치를 만든 회사가 망치의 품질에 책임을 지되 그 망치로 잘못 친 못에 대해서는 사용자가 책임을 지는 구조와 같습니다. 글로벌 법체계는 기술의 안전성과 별개로 결과물에 대한 사용 주체의 책임을 무겁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AI 자막 고지’로는 막을 수 없는 마케팅 잔혹사
한국에서는 2026년 1월 22일에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이하 AI 기본법)이 시행되었습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투명성 확보 및 고영향 인공지능 사업자 책무 가이드라인을 잇따라 발표했고, 광고 영역에서는 AI 생성 콘텐츠에 대한 고지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이 법 제도가 스타벅스 탱크데이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불가능했습니다.
현재 AI 기본법의 광고 관련 책무는 소비자가 AI 생성물임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라벨링 의무’가 중심입니다. 그러나 이번 스타벅스 마케팅 카피는 라벨링 대상이 아닙니다. AI는 단어 후보를 제시했을 뿐, 최종 카피를 선택하고 디자인을 결합한 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태가 드러낸 핵심 과제는 라벨링이 아닌 ‘검증 의무’입니다. 사용자가 AI의 결과물을 가공하여 본인의 이름으로 내보낼 때, 그 결과물의 사회적 맥락을 어떻게 점검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현행법은 이 영역에 직접적인 규제를 두지 않은 채 일반 책임법리(불법행위, 소비자보호법 등)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법 제도가 책임을 명확히 정의하지 못하면, 책임은 결국 매번 사회적 파장이 일어난 뒤에야 소급하여 따지게 됩니다.
그래서 책임은 누가 지는가
질문을 처음의 자리로 되돌립니다. AI가 한 작업의 책임은 누가 지는가.
명확한 사실은 한 곳에 책임을 전부 떠넘기는 방식이 가장 위험하다는 점입니다. 직원 개인에게 떠넘기면 조직의 시스템은 결함을 고치지 못하고, 최고경영자 한 사람이 모두 안고 가 버리면 구조적 부주의가 은폐됩니다. AI에 책임을 전가하는 순간 책임의 주체 자체가 증발해 버립니다.
여기서 말하는 책임의 층위는 형식적인 결재 단계를 뜻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실질적으로 인식하는 구조를 의미합니다.
입력한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단어의 사회적 무게를 알아야 하고, 검토하는 사람은 실제로 파일을 열어 리스크를 점검해야 하며, 조직은 AI 도입에 걸맞은 검증 프로세스를 새로 구축해야 합니다. 법과 제도 역시 라벨링 조항을 넘어 실질적인 검증 의무의 기준을 정립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일하는 곳에서 AI가 제안한 결과물을 최종적으로 검증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그 결과물이 사회에 나가도 괜찮다는 판단을 책임 있게 내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앞 단계의 누군가가 스크리닝했을 것이라며 무심히 넘기고 있습니까.
스타벅스의 8일이 남긴 질문은 우리 모두의 지향점을 묻고 있습니다.
FAQ
2026년 5월 18일 스타벅스코리아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에 ‘탱크데이’ 마케팅을 진행해 사회적 비판을 받은 사건입니다.
기존 텀블러 홍보 문구 ‘가방에 쏙’과 운율을 맞추기 위해 AI에게 물었고, 5·18은 생각하지 못했다는 진술입니다.
글로벌 법체계는 AI를 사용한 주체에게 책임을 부과합니다. 캐나다 에어캐나다 판결과 EU AI Act 모두 사용자와 운영 주체의 책임에 무게를 둡니다.
막을 수 없습니다. AI 기본법은 ‘AI 생성물 라벨링’ 의무가 중심이고, 사용자가 AI 결과물을 가공해 본인의 카피로 채택할 때의 검증 의무는 직접 규제하지 못하는 공백이 있습니다.
입력자, 검토자, 조직, 법 제도가 각자의 위치에서 실질적으로 책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형식적인 결재 단계가 많은 것과 사람이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시스템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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