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 살아남을 사람은 딱 두 부류뿐입니다. 직업 훈련을 받은 기술직이거나, 신경다양인이거나.
2026년 3월, 팔란티어 CEO 알렉스 카프가 미국 테크 미디어 TBPN에 출연해서 한 말입니다. 포춘(Fortune)이 이 발언을 보도하면서 글로벌 테크 업계에 상당한 파장이 일었어요.
‘신경다양인(Neurodivergent)’이라는 말이 낯설 수 있습니다.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은 ADHD, 난독증, 자폐 스펙트럼처럼 뇌가 다수와 다르게 작동하는 것을 ‘비정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변이’로 보는 관점이에요. 1990년대 후반 호주의 사회학자 주디 싱어가 처음 제안했습니다. 최근 글로벌 기업과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어요.
카프 CEO는 심한 난독증을 갖고 있어요. 2025년 12월 뉴욕타임스 딜북 서밋에서 “심각한 난독증이 있으면 정해진 방식대로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플레이북을 완전히 익힐 수 없으니, 자유롭게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고요.
여기까지만 보면 꽤 멋진 이야기예요. “다르게 사고하는 사람이 AI 시대를 이끈다.” 그런데 이 선언을 듣고 나서 떠오른 질문이 하나 있었어요. 한국에서 ADHD가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신경다양인의 뇌가 AI와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
신경다양성에는 ADHD, 난독증, 자폐 스펙트럼 등 다양한 유형이 있어요. 여기서는 AI가 약점을 보완하는 구조가 잘 드러나는 ADHD를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의 핵심 어려움은 ‘실행 기능’에 있어요. 계획 세우기, 우선순위 정하기, 시간 관리, 충동 조절. 이게 의지 부족이 아니라 뇌 발달 구조의 차이라는 건 이미 의학적으로 확립된 사실입니다.
재밌는 건, AI가 정확히 이 영역을 보완한다는 거예요.
패스트컴퍼니 칼럼에서 정신건강 상담사이자 ADHD 당사자인 메러디스 오코너(Meredith O’Connor)는 이렇게 설명했어요.
AI는 신경다양인이 어려워하는 많은 과업에서 인간보다 뛰어나다. 반면 기업가 정신, 소통, 문제 해결처럼 AI가 아직 인간을 이길 수 없는 영역은 ADHD인이 뛰어난 영역과 겹친다.
이건 일방적인 이야기가 아니에요. 드렉셀 대학교 존 코우니오스(John Kounios) 교수팀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ADHD 증상이 강한 사람은 문제를 분석적으로 풀기보다 ‘통찰’로 풀어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계적 추론이 아니라 무의식적 연결을 통해 “아하!” 하는 순간이 오는 거죠. 코우니오스 교수는 “챗봇은 이런 자발적 인지를 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ADHD인이 잘하는 건 아무도 문제인 줄 몰랐던 것에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라고요.
AI는 ADHD 뇌의 약점(실행 기능)을 보완하고, ADHD 뇌는 AI의 약점(창의적 통찰)을 보완합니다. ADHD에 국한된 데이터는 아니지만, 비슷한 맥락의 조사가 있어요. EY와 마이크로소프트가 17개 조직의 장애·신경다양성 직원 300명 이상을 조사한 결과, 88%가 AI 어시스턴트 사용 후 생산성이 향상됐다고 답했습니다.
팔란티어는 채용까지 바꿨다
카프 CEO는 선언에서 그치지 않았어요. 팔란티어는 ‘신경다양인 펠로십’을 신설했습니다. 채용 공고에는 “신경다양인들은 미국과 서방의 미래를 형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적혀 있어요.
가트너 예측에 따르면, 포춘 500대 기업 영업 조직의 5분의 1이 2027년까지 신경다양인 인재를 적극 채용할 전망입니다. SAP는 2013년부터 ‘Autism at Work’ 프로그램을 운영해 유지율 90% 이상을 기록하고 있어요. 제이피모건 체이스도 같은 이름의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파일럿에서 자폐 스펙트럼 직원이 기존 직원보다 48% 더 빠르게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생산성은 최대 92%까지 높았어요.
여기서 중요한 맥락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SAP와 제이피모건 체이스의 성과는 전부 조직적 지원이 전제된 환경에서 나온 거예요. SAP는 팀 내 ‘자폐증 친구(Autism Buddy)’, 외부 멘토, 코치를 배치해요. 제이피모건 체이스는 업무 코치와 커뮤니티 멘토가 포함된 서포트 서클을 운영합니다. 소음 차단 헤드폰, 좌석 재배치, 유연 근무 같은 편의 제공도 기본이에요. 제이피모건 체이스 글로벌 신경다양성 총괄 브라이언 길(Bryan Gill)은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고 했지만, 핵심은 ‘비용’이 아니라 ‘이 시스템이 존재하느냐’예요.
조직적 지원 프로그램 없이 “ADHD는 초능력”이라고 말하는 건, 물고기에게 아무것도 안 준 채 “나무 위로 올라가”라고 하는 꼴입니다.
한국 성인 ADHD 12만 명, 그리고 침묵
한국으로 와볼게요. 신경다양성 중에서도 한국에서 가장 빠르게 가시화되고 있는 건 ADHD입니다. 2024년 기준 성인(20대 이상) ADHD 진료 인원은 12만 2,614명으로, 10만 명을 넘긴 건 이때가 처음입니다. 2020년 2만 5,297명에서 4년 만에 약 4.9배(385%) 늘었어요. 30대 여성 진료비는 같은 기간 약 11배(992%) 급증했습니다. 전체 ADHD 진료 인원은 26만 명을 넘었어요.
그런데 이 숫자 뒤에는 다른 현실이 있습니다. 한국일보 보도에 따르면, ADHD 진단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자 해고된 사례가 있었어요. “주의력 결핍 등으로 제대로 일을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병명을 알자마자 해고하는 경우”라고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인터뷰에서는 “ADHD 진단을 받아도 취업 때 불이익이 걱정돼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F코드(정신과 진료 기록)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치료 자체를 가로막는 거예요.
민바람 작가가 쓴 ‘나는 ADHD 노동자입니다'(루아크, 2025)는 이 현실을 정면으로 보여줘요. 8년간 40곳의 직장을 옮겨다닌 경험, 서른여덟에 성인 ADHD 확진을 받기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연재에서는 “사소해 보이는 고통이 사소하지 않다는 걸 믿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고 썼어요.
65%가 말하지 못하는 이유
이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2023년 영국에서 신경다양성 직원 99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가 있어요. 런던 버크벡 대학교와 NiB가 수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65%가 관리자의 차별이 두려워 자신의 상태를 공개하지 못했습니다. 55%는 동료의 차별도 걱정했고요. 이직 의향이 “매우 가능” 또는 “가능”이라고 답한 비율은 43%에 달했습니다.
2024년 후속 보고서에서는 상황이 더 나빠졌어요. 심리적 안전감은 하락했고, 커리어 만족도도 떨어졌습니다. CIPD(영국 인사관리협회)의 2024년 조사에서는 영국 고용주의 33%만이 신경다양성을 DEI 전략에 포함하고 있었고, 32%는 “우리 조직의 초점이 아니다”라고 답했어요.
카프 CEO가 “신경다양인이 AI 시대를 이끈다”고 선언할 수 있는 건, 그가 팔란티어의 CEO이기 때문이에요. 자본과 권력이 있는 위치에서 난독증을 공개하는 것과, 수습 기간에 ADHD를 공개하는 건 완전히 다른 경험입니다.
“신경다양인은 AI 시대의 초능력” 서사가 빠뜨린 전제
하나 더 짚어야 할 게 있어요. 카프 CEO는 ‘신경다양인’을 의학적 진단과 무관하게 “정해진 틀을 거부하고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으로 넓게 해석했습니다. “다르게 생각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독자적인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
이런 해석이 신경다양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줄이는 효과는 분명 있어요. 하지만 미묘한 간극도 생깁니다. “틀 밖에서 사고하기(thinking outside the box)”는 찬사인데, “적응하지 못하기(not fitting in)”는 퇴출 사유가 되니까요. 카프의 프레이밍에서 전자는 강조되고, 후자는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실제 ADHD 당사자의 직장 경험에서는 이 둘이 동전의 양면입니다.
ADHD 뇌가 가진 창의성, 패턴 인식, 하이퍼포커스(과집중)가 AI 시대에 가치 있다는 주장은 연구로 뒷받침돼요. 앞서 언급한 드렉셀 연구도 그중 하나입니다. 문제는, 이 강점이 발휘되려면 실행 기능의 어려움을 지원하는 환경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빠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ADHD가 AI 시대에 유리하다”는 말은, 제대로 된 진단과 지원이 뒷받침돼야 의미가 있어요. 약물 치료, 상담, 직장 내 편의 제공, 관리자 교육. 한국에서는 성인 ADHD 치료제인 콘서타조차 2024년에 공급 차질이 발생해 처방을 못 받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강점을 이야기하는 건 좋지만, 그 전제인 지원을 무시한 채 “초능력”만 말하면 오히려 의료적 지원의 필요성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어요.
AI 시대의 진짜 질문
AI와 신경다양인의 뇌는 서로의 약점을 메워주는 관계예요. AI가 계획과 정리를 대신하고, 신경다양인의 뇌가 창의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팔란티어, SAP, 제이피모건 체이스 같은 기업은 이 조합에서 실제 성과를 내고 있어요.
그런데 이 성과의 전제를 빠뜨리면 이야기가 위험해집니다. “신경다양인이 AI 시대에 살아남는다”가 아니라, “신경다양인이 말해도 안전하고, 지원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AI를 만나면 강력한 조합이 된다”가 정확한 문장인 거죠.
카프 CEO의 선언은 방향으로서는 맞아요. 하지만 다른 신경다양인에게 이 선언이 닿으려면, 먼저 “나는 ADHD가 있어요”, “난독증이 있어요”라고 말했을 때 잘리지 않는 사회가 와야 해요.
카프가 무대 위에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모습이 화제가 됐을 때, 팔란티어는 그 영상을 계기로 신경다양인 펠로십을 만들었어요. 누군가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이 채용 프로그램이 된 겁니다.
같은 장면이 글로벌 기업의 CEO가 아닌, 일반 직장인에게 벌어졌다면 어땠을까요. “회의 중에 왜 가만히 못 앉아 있냐”는 지적이 먼저 왔을 겁니다. 이 차이가, 선언과 현실 사이의 거리입니다.
어쩌면, AI 시대의 진짜 질문은 “누가 살아남느냐”가 아니라, “누가 얼마나 말할 수 있느냐”가 아닐까요?
FAQ
EY와 마이크로소프트 조사에서 신경다양성 직원 88%가 AI 도구로 생산성이 향상됐다고 답했어요. ADHD의 경우 드렉셀 대학교 연구에서 통찰(insight) 기반 문제 해결에 뛰어나다는 결과도 나왔습니다. 다만 조직적 지원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계획 세우기, 우선순위 정하기, 시간 관리 같은 실행 기능을 AI가 보완해요. 회의 요약, 문서 핵심 추출, 과업 분해 등이 대표적입니다.
직장 내 신경다양성 공개를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가 아직 부족해요. 공개 여부는 조직 문화에 따라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카프 CEO는 진단 여부와 무관하게 “틀을 거부하는 사고방식”으로 넓게 해석했어요. 당사자 커뮤니티에서는 의료적 지원 필요성이 희석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진단과 치료가 가능해요. 2016년부터 성인 ADHD 보험 적용 연령이 6~65세로 확대됐습니다.
글로벌 기업 중 SAP, 마이크로소프트, 제이피모건 체이스, EY 등이 전용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한국에서는 유사한 규모의 프로그램은 아직 확인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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