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무장해제되어야 합니다.
2026년 5월 25일 오전, 바티칸 시노드 강당에서 교황 레오 14세가 한 말입니다. 약 3만 8,000 단어, 245개 항으로 구성된 회칙 ‘마니피카 후마니타스(Magnifica Humanitas·위대한 인간성)‘를 직접 발표하는 자리였습니다.
회칙은 가톨릭에서 가장 구속력이 강한 사목 교서입니다. 13억 가톨릭 신자와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글이죠. 교황이 회칙을 본인이 직접 발표하는 건 이례적인 행보입니다. 그만큼 가톨릭교회가 이 주제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무장해제”는 교황이 의도적으로 고른 단어입니다. 본인 역시 “이 순간이 세간의 주의를 끌고, 양심을 깨우며, 인류를 위한 길을 제시할 명확한 표현을 요구한다”고 배경을 밝혔습니다. 교회가 오랫동안 핵 무장해제를 외쳐온 것처럼, 이제 AI도 “지배, 배제, 죽음의 도구로 만드는 논리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데이터 노예제와 거대 권력의 불투명한 지배
회칙 발표 연설에서 교황 레오 14세는 명백한 우려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편견과 불의로 오염된 데이터에 기반해 의료, 고용, 안전에 대한 접근을 차단할 수 있는 알고리즘에 대한 매우 우려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추상적인 우려가 아닙니다. 알고리즘이 누구를 차단하는가, 누구를 자르는가에 대한 직접적인 진단입니다.
더 날카로운 지적은 회칙 본문에서 드러납니다. 회칙은 디지털 경제가 보이지 않는 노동력 착취 위에 세워져 있다며, 이를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로 규정했습니다. 데이터 라벨링과 대규모 AI 모델 학습을 위해 저임금으로 동원되는 전 세계 숨은 노동자들의 현실을 직시한 것입니다.
교황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만 의존해서는 결코 공공선을 이룰 수 없다고 단언하며, 정치가 노동의 존엄성을 수호하고 혁신 성과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본연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나아가 디지털 공간의 권력 집중도 짚었습니다. 플랫폼과 데이터, 인프라가 국가가 아니라 소수의 거대 경제·기술 세력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거죠. 권력이 소수에 집중되면 불투명성, 의존, 배제, 불평등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는 경고였습니다.
사상 최대 실적 뒤에 숨은 7,800명의 지워진 얼굴들
회칙이 지목한 우려는 멀리 있는 미래 이야기가 아니에요. 엿새 전, 한 글로벌 은행 CEO가 회칙이 가리킨 우려를 동시대에 그대로 드러내는 발언을 했습니다.
영국계 글로벌 금융기업 스탠다드차터드를 11년째 이끌고 있는 CEO 빌 윈터스(Bill Winters)는 5월 19일 홍콩에서 열린 투자자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용 절감이 아닙니다. 일부 경우 ‘더 낮은 가치의 인적 자본(lower-value human capital)’을 우리가 투입하는 금융 자본과 투자 자본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이 발언과 동시에 은행 측은 약 7,800명에 달하는 직원의 감원 계획을 공식화했습니다. 전체 임직원 중 백오피스를 담당하는 노동자 5만 2,000명 가운데 15% 가량을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정리하겠다는 게 요지였죠.
아이러니하게도 이 발표는 분기 영업수익 59억 달러, 세전이익 25억 달러라는 사상 최대의 실적 성적표를 치켜든 직후에 나왔습니다.
자본 시장의 냉혹한 시선은 즉각 거센 역풍을 불렀습니다. 싱가포르의 할리마 야콥(Halimah Yacob) 전 대통령은 “인간을 자본의 도구로 깎아내리는 태도는 충격적”이라며 공개 비판했습니다. 홍콩금융감독원(HKMA)과 싱가포르 통화청(MAS) 등 규제 당국도 공식 해명을 요구하고 나섰죠.
파장이 일자 윈터스 CEO는 사내 메모를 통해 “자극적인 헤드라인이나 맥락을 생략한 인용 탓에 오해가 생겼을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본질이 있습니다. 그의 발언은 실적 부진을 기술 도입이라는 핑계로 포장하려는 흔한 ‘AI워싱’의 사례가 아닙니다. 역대급 호실적 속에서 기업이 인간 노동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 것에 가깝습니다.
해명 서한 역시 억울함을 토로했을 뿐, 단어 자체의 철회를 선언하지는 않았습니다.
‘낮은 가치’와 ‘위대한 인간성’의 거리
빌 윈터스의 “낮은 가치(lower value)”와 교황 레오 14세의 “위대한 인간성(magnifica humanitas)” 선언 사이의 간격은 단 6일에 불과했습니다. 동일한 인간을 두고, 두 진영이 정반대의 척도를 제시한 거죠.
윈터스의 표현에서 인간은 자본의 한 종류입니다. 감가상각과 대체를 따져야 하는 자본 자산의 일종이죠. 경영학에서 통용되던 ‘인적 자본(human capital)’이라는 메마른 용어에 ‘낮은 가치’라는 노골적인 수식어가 붙는 순간, 인간의 실존은 한낱 저렴한 기계 부품의 규격으로 환원됩니다.
바티칸의 선언은 이 지점을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라틴어 회칙명에 쓰인 ‘마니피카(Magnifica)’는 측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의미합니다. 효율의 저울 위에 올려놓고 비싸거나 저렴함을 비교하는 셈법 자체를 원천 무효화하는 선언인 거죠. 교황은 연설을 통해 이를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
누구도 생산성, 인지 수행, 또는 단순한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가치의 충돌은 인류 역사에서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19세기 영국 면방직 공장에서 노동자는 ‘Hands(손)’라고 불렸습니다. “거대한 면방직 공장에서 일하는 손들(The hands employed in the great cotton-mills)“이라는 공식 보고서 표현이 남았습니다. 사람의 신체를 오직 생산 수단으로만 한정 지은 거죠.
1891년 교황 레오 13세가 역사적인 회칙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을 통해 통렬히 고발했던 지점이 바로 이 ‘손’의 시선이었습니다. 현 교황이 자신의 명호를 레오 14세로 택하고 회칙 반포일을 135주년에 정확히 맞춘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산업혁명과 노동자 권리가 짝이었다면, AI와 인간 존엄이 이 시대의 짝이라는 선언인 겁니다.
그리고 2026년, 글로벌 자본 시장의 리더는 135년 전의 그 차가운 시선을 ‘낮은 가치의 인적 자본’이라는 세련된 경영학 용어로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10조 원의 기술 도약 속, 지워진 노동의 안전장치
윈터스의 발언에 즉각 소명과 청문을 요구했던 홍콩이나 싱가포르의 공적 거버넌스 시스템은 과연 한국에도 존재할까요.
올해 1월 한국에서는 이른바 AI 기본법이 시행되었습니다. 한국 인공지능 규제 체계의 대들보 역할을 하는 법안입니다. 그런데 이 법에 노동 영향을 직접 규정한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고영향 AI 분류, 영향평가, 안전 의무 같은 조항은 있죠.
그런데 “AI 도입으로 인한 직무 대체 시 사업주의 의무”나 “AI로 인한 인건비 재조정 시 통보·협의 절차” 같은 구체적인 노동 보호 장치는 명시돼 있지 않습니다. 한국노동연구원도 별도 보고서에서 AI가 인사·노무 관계에 들어오는 데 대한 노동법 대응이 미흡하다고 짚은 바 있습니다.
정부의 2026년 예산안 기조도 이와 궤를 같이 합니다. 국가적 기술 경쟁력 확보라는 명분 하에 AI 분야에만 무려 9조 9,334억 원의 막대한 공적 재정이 편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정부 예산에서 ‘AI 전환에 따른 노동 보호’에 명시 편성된 예산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AI를 만드는 데는 10조 가까이 쓰지만, AI로 일을 잃거나 인건비가 깎이는 사람을 보호하는 데는 별도 예산이 잡혀 있지 않은 겁니다. 제도와 예산이 모두 AI산업의 그늘을 외면하고 있다면, 과연 무너지는 존엄의 빈자리는 누가 지키는 걸까요?
자동으로 주어지는 존엄의 울타리는 없다
산업혁명기 노동자 권리는 자동으로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8시간 노동제도, 단체교섭권, 산업재해 보상, 모두 누군가 거리에서 외치고, 누군가 의회에서 다투고, 누군가 신문에 글을 써서 만들어진 겁니다. 자동으로 만들어진 권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교황은 25일 발표 연설에서 “각 건축자가 어떻게 짓는지 신중히 선택하도록”이라는 고린도전서 한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AI 시대 인간의 자리를 짓는 건축자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세계에 던졌습니다.
AI 시대, 인간 존엄의 울타리를 우리는 어떻게 짓고 지켜나가야 할까요?
“낮은 가치의 인간”과 “위대한 인간성” 사이에서, 각자가 나침반을 잡아야 할 때입니다.
FAQ
교황 레오 14세가 2026년 5월 25일 발표한 즉위 후 첫 회칙으로, AI 시대 인간 존엄의 보호를 다뤘습니다. 라틴어로 ‘위대한 인간성’이라는 뜻입니다. 약 3만 8,000 단어, 245개 항으로 구성됐고, 핵심 메시지는 “AI는 무장해제되어야 한다”입니다.
AI를 거부하자는 게 아니라, AI를 “지배, 배제, 죽음의 도구로 만드는 논리로부터 해방”하자는 의미입니다. 핵 무장해제에 비유한 표현입니다. 자율 무기 시스템, 데이터 독점, 알고리즘 차별을 막아야 한다는 진단입니다.
2026년 5월 19일 홍콩 투자자 행사에서 “비용 절감이 아닙니다. 일부 경우 더 낮은 가치의 인적 자본(lower-value human capital)을 우리가 투입하는 금융 자본과 투자 자본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030년까지 백오피스 직원의 15% 이상, 약 7,800명을 줄일 계획입니다. 전체 직원 약 8만 명 중 백오피스가 약 5만 2,000명입니다.
2026년 1월 시행된 AI 기본법은 고영향 AI 분류, 영향평가, 안전 의무 등을 규정합니다. 그러나 AI 도입으로 인한 직무 대체나 인건비 재조정 시 노동자 보호 절차에 대한 구체적 규정은 명시돼 있지 않습니다.
AI워싱은 경영 부진을 ‘AI 전환’ 명분으로 가리는 행위입니다. 윈터스 발언은 사상 최대 분기 실적 직후 나왔기 때문에 워싱이 아닙니다. 자본 대체 논리를 그대로 드러낸 발화입니다.
그럼 진짜 AI워싱은 뭐죠? 더 알고 싶다면?
AiLit에서 더 알아보기
구독을 신청하면 최신 게시물을 이메일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