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평가를 준비하는 고등학생의 책상 위 풍경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검색창에 키워드를 입력하고 여러 사이트를 오가며 자료를 모았다면, 이제는 생성형 AI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교실에서도 이 변화를 낯설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요즘 학생들은 다 AI로 수행평가를 한다”는 말은 더 이상 체감에만 머물지 않는다. 실제 조사에서도 대부분의 고등학생이 생성형 AI를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들의 학습 방식이 달라진 지금, 학교도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수행평가 준비는 검색창 대신 AI로
입시업체 진학사가 2025년 10월 전국 고등학생 35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96.6%가 수행평가나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 준비 과정에서 생성형 AI를 활용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 가운데 ‘매번 사용한다’는 응답이 31.3%, ‘대부분 사용한다’는 응답이 46.7%로, 절반이 넘는 학생이 생성형 AI를 일상적인 학습 도구처럼 활용하고 있었다.
더 눈에 띄는 건 정보를 찾는 방식의 변화다. 정보를 조사할 때 가장 자주 사용하는 수단으로 AI를 꼽은 학생은 58.4%였다. 검색엔진(20.8%)과 논문·자료 사이트(10.5%)를 크게 앞선 수치다. 이번 조사에서는 검색엔진보다 AI가 정보 탐색의 출발점이 된 학생들이 더 많았다는 의미다.
물론 이 조사만으로 모든 학생의 학습 방식이 바뀌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학교 현장에서는 생성형 AI가 더 이상 특별한 도구가 아니라, 수행평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활용되는 학습 도구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베끼는 게 아니라, 고쳐 쓴다
AI를 쓴다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레 ‘복붙(복사·붙여넣기)’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실제 데이터는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위 같은 조사에서 AI 결과물을 그대로 제출하지 않고 절반 이상 수정한다고 답한 학생이 80%였다(절반 정도 수정 39% / 대부분 수정 37% / 전부 새로 씀 4%). 결과물을 거의 손대지 않는다는 응답은 1.1%에 그쳤다.
왜 고쳐 쓸까. 학생들이 꼽은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의견·관점·독창성을 반영하기 위해서”였고(99건), 그다음은 “학교 평가를 의식해서”였다(95건). 감점을 우려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담기 위한 목적 역시 중요한 이유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많은 학생이 생성형 AI를 ‘대신 써주는 도구’라기보다 초안을 만들고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학습 도구로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연철 진학사 입시전략연구소장은 이 흐름을 “고교학점제 도입으로 학생부의 중요성이 커진 상황에서, 생성형 AI 대중화가 탐구의 기본 수준을 전반적으로 끌어올린 결과”라고 짚었다. “이제는 활동의 양이나 분량을 나열하는 것보다, 탐구의 깊이와 차별성이 학생의 변별력을 좌우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결국 AI가 누구에게나 비슷한 출발점을 제공하는 시대일수록 중요한 것은 AI를 사용했는지가 아니라, 그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발전시켰는지다. 학생들의 AI 활용 방식이 단순한 ‘복사·붙여넣기’를 넘어서는 만큼, 학교 역시 AI 사용 자체를 금지하기보다 어떤 방식으로 활용했는지를 평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학교의 답: AI 금지 대신 관리
학생들의 AI 활용이 이미 일상이 된 상황에서, 교육 당국이 선택한 방향은 전면 금지가 아니었다. 학생들이 AI를 사용하는 현실을 인정하되, 학교가 공정한 평가 기준을 마련할 수 있도록 관리 체계를 만드는 쪽을 택한 것이다. 교육부는 최근 일부 학교에서 AI를 활용한 부정행위 논란이 이어지면서 학교 현장의 혼란을 줄이고 공정한 평가를 지원하기 위해 이번 방안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교육부와 전국 17개 시도교육청은 2025년 12월 23일 ‘수행평가 시 인공지능(AI) 활용 관리 방안’을 공동으로 확정해 발표했다. 시도교육청은 이를 반영해 2026학년도 학업성적관리 시행지침을 개정했고, 2026년 3월 새 학기부터 전국 초·중·고에서 적용하고 있다.
관리 방안은 크게 다섯 가지로 구성된다. 핵심은 AI 사용 여부를 일률적으로 금지하거나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과목과 과제의 특성에 맞게 활용 범위를 명확히 정하고, 그 과정까지 평가에 반영하자는 것이다.
❶ AI 활용 범위 설정
교사는 수행평가를 시행하기 전에 과목별 평가 요소와 채점 기준을 고려해 AI를 어디까지 활용할 수 있는지 미리 정한다. 자료 조사만 허용할지, 초안 작성까지 허용할지 등은 과제의 목적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학생들에게 사전에 안내하도록 했다.
❷ AI 활용 과정 표기 지도
학생이 AI를 활용했다면 어떤 AI를 사용했고, 어떤 질문(프롬프트)을 입력했는지, 결과물을 어떻게 수정·보완했는지 등을 결과물과 함께 기록하도록 했다. 가이드라인을 벗어난 AI 활용이 확인되면 부정행위로 판단할 수 있으며, 세부 기준은 시도교육청과 학교가 학업성적관리 규정에 따라 마련하도록 했다.
❸ 학생 유의 사항 안내 및 사전교육
학교는 학기 초 평가 계획을 안내할 때 AI 활용 기준과 유의사항을 함께 교육한다.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는지를 평가 전에 학생들이 충분히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다.
❹ 평가 설계 방향
집에서 완성해 오는 과제형 평가의 비중을 줄이고, 수업 시간에 교사가 학생의 탐구 과정을 직접 관찰하는 활동 중심 평가를 확대하기로 했다. AI가 결과물은 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인 만큼, 무엇을 만들었는지보다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평가하겠다는 방향이다.
❺ 개인정보 보호
학생들은 이름, 학번, 생년월일, 주소, 연락처, 가족관계, 타인의 사진 등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를 생성형 AI에 입력하지 않도록 지도받는다.
이번 관리 방안은 AI를 교육 현장에서 배제하기 위한 규제가 아니다. 오히려 AI 활용을 하나의 현실로 인정하고, 그 현실에 맞는 평가 기준을 마련하려는 첫걸음에 가깝다. 결국 학교가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AI를 사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AI와 함께 학습하는 시대에 무엇을 평가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AI 시대, 학교의 새로운 과제

교육부가 새로운 관리 방안을 내놓았다고 해서 현장의 고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학생들의 AI 활용이 일상이 된 만큼, 학교는 AI를 금지하거나 적발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AI 시대에 맞는 평가 방식을 만들어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됐다.
AI가 결과물의 초안을 빠르게 만들 수 있는 시대에는 결과물만으로 학생의 역량을 판단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자연스럽게 평가는 완성된 결과보다 학생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탐구하고, AI의 답을 어떻게 검토하고 발전시켰는지까지 함께 살펴보는 방향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한 교육정책 연구기관 연구위원도 “AI가 생성한 학습 데이터를 해석해 학생의 성취 수준을 진단하는 데이터 기반 평가 설계 역량이 필요하다”며, AI가 쉽게 만들어낼 수 없는 비판적 사고와 문제 해결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과제 설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AI를 활용한 학생의 재구성과 수정 수준을 평가할 새로운 채점 기준(루브릭)을 마련하는 일 역시 앞으로 중요한 과제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리고 서울시교육청은 AI 서·논술형 채점 시스템 ‘채움아이’를 2027년까지 전 학교에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AI를 활용한 학습이 늘어나는 만큼, 평가와 채점 역시 새로운 기술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다.
학생들은 이미 AI를 학습 도구로 받아들이고 있다. 교육부도 이에 맞춰 새로운 기준을 마련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AI를 교실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다. AI와 함께 배우는 시대에 무엇을 평가하고,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학교가 만들어가는 일이다.
FAQ
진학사가 2025년 10월 전국 고등학생 351명을 조사한 결과, 96.6%가 수행평가나 생기부 준비에 생성형 AI를 활용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정보 조사 수단 1위도 AI(58.4%)로 검색엔진(20.8%)을 앞질렀다.
교육부와 전국 17개 시도교육청이 공동으로 확정한 방안으로, 2026년 3월 신학기부터 전국 초·중·고에 적용된다. AI 활용 범위 설정, 활용 과정 표기, 학생 사전교육, 평가설계 방향, 개인정보보호 5개 영역으로 구성된다.
아니다. 교사가 사전에 정한 범위 안에서 AI를 쓰고, 어떤 AI를 어떤 질문으로 어떻게 활용했는지 표기하면 문제없다. 다만 이 기준을 어기고 AI를 활용한 사실이 확인되면 부정행위로 간주해 학칙에 따라 처분한다.
학생들의 AI 활용이 늘어나면서 학교마다 AI 사용 기준이 달라 혼란이 발생했고, 일부에서는 AI를 활용한 부정행위 논란도 있었다. 이에 AI 사용을 금지하기보다 학교가 공정한 평가 기준을 마련할 수 있도록 2026학년도부터 새로운 관리 방안을 적용했다.
전문가들은 교사가 AI 결과물과 학생의 실제 역량을 구별할 수 있는 데이터 기반 평가 설계 역량, 그리고 이를 위한 새로운 채점 기준 개발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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